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문단 편집) == 개요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S73507,_Erich_von_dem_Bach-Zelewski.jpg|height=300]]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3a8a51bed35ca6338d5fcd182d7c2ce.jpg|height=300]] || [[파일:external/www.germaniainternational.com/ultimatechained36modssoffdag17.jpg|height=300]] || || ▲ 1944년에 찍은 사진. || ▲ 컬러 복원한 사진. || ▲ [[슈츠슈타펠|SS]] 고위 장교들.[* 앞줄 왼쪽부터 바흐첼레프스키, [[빌헬름 레디스]](Wilhelm Rediess),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파울 모더]](Paul Moder).] [[http://forum.axishistory.com/viewtopic.php?t=14230&start=1455|출처]]. || >난 소련에서도 암살당할 뻔한 적이 없는 유일한 SS 지도자였습니다. 어느 곳이건 경호원 없이 걸어다닐 수 있었죠. >(I was the only SS leader in Russia who was not assassinated or upon whom an assassination was never attempted. I could walk anywhere without a bodyguard.)[*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https://en.wikiquote.org/wiki/Erich_von_dem_Bach|출처]]. >첼레프스키 에게는 수많은 별명이 있었다. 동부전선의 도살자, 벨라루스의 도살자, 세바스토폴의 도살자, 그리고 최근에는 바르샤바에 일건으로 바르샤바의 도살자, 호르티 장군이라고 별명이 생겼다. 아무도 호르티와 옆에 있기를 싫어 했고, 말도 걸지 않을 정도였다. 대다수 장성들에게 그는 매우 꺼림칙하고, 재수 없는 존재였다. >---- >[[알프레트 요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SS]] 휘하 [[무장친위대]], [[게슈타포]]의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슈츠슈타펠/계급#s-3.2|상급집단지도자]](Obergruppenführer). [[동부전선]]([[독소전쟁]]) [[파르티잔]] 봉기 진압의 총 책임자였던 인물이다.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함께 [[바르샤바 봉기]]를 악랄하게 탄압한 3인 중 한 명으로 유명하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설립을 [[하인리히 힘러]]에게 건의해 수용소가 세워지게 한 원흉이다. 무장친위대에 [[사병 출신 장성|병사로 입대한 후 장군이 되었으며]] 동부전선에서 [[벨라루스 초토화]] 등 잔혹한 파르티잔 탄압 작전을 주도해 '''확인한 사망자만 40~50만 명'''이다. [[발트 3국]] 일대에서 4-5만, [[벨라루스]] 등 러시아 중부 지방에서 20만, [[바르샤바 봉기]]에서 2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저지른 전범 행위만 본다면 사형이 당연한 인물이었으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학살의 책임을 국방군 탓으로 전가한 덕분에 피고 신분이 아닌 증인 신분으로 대우받았다. 재판 후 [[서독]]에서도 특별 노역, 가택 연금 등의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